누구(NUGU)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1루수가 누구야’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원작은 1루수에 ‘누구’, 2루수에 ‘무엇’, 3루수에 ‘몰라’ 같은 독특한 내야수 이름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미국 코미디였는데, 우리 정서에 맞게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한 터라 색다른 재미를 안겨줬더랬다.
그런데 오해를 일으킬 만한 또 다른 ‘누구’가 등장했다. SKT의 지능형 스피커 ‘누구'(NUGU)다. 사람이 아닌 제품에 ‘누구’라고 부르려니 왠지 어색하다.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처럼 학습하는 지능형 서비스를 탑재하고 있으니 조금은 사람처럼 이해해 달라는 의미라면, 동의할 만한 이름은 아니다.
사실 누구를 쓰기 시작한 것은 거의 두어달 전부터니까 이 글을 쓰기까지 꽤 오래 걸린 셈이다. 그런데 이유가 있다.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발전이 있을 때까지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공개하는 지금은 좀 나아졌다는 이야기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아니다’.
누구의 핵심은 이용자가 말하는 맥락을 이해하고 그 의도를 실행하는 지능형 서비스다. 때문에 장치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기능보다 우선적인 것은 이용자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된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환경의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누구를 깨워서 말한 뒤 결과가 나오는 과정에서 받게 되는 모든 느낌은 이 제품을 평가하는 첫 요소다.
그런 점에서 보면 누구의 느낌은 부자연스럽다. 첫 설정에서 일부 스마트폰과 호환되지 않는 문제들은 충분히 고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누구를 부르는 이름, 내 지시에 대한 이해 범위, 누구의 어투는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도 적응하긴 어려운 부분이다.
나는 ‘아리야’, ‘레베카’, ‘크리스탈’, ‘팅커벨’ 가운데 레베카를 누구의 이름으로 정했다. 그러니까 누구 앞에서 “레베카”라고 말하면 내 지시를 받기 위해 켜진다는 뜻이다. 무론 레베카라는 이름이 좋아서 고른 것은 아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이름은 없고, 내 마음대로 이름을 정할 수도 없다. 굳이 이름을 바꿔 부른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중 인격, 아니 기계니까 다중적 개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애써 친절한 사람처럼 보이려는 누구의 음색이 정말 싫다. (이 목소리를 녹음한 전문 성우에게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누구를 깨웠을 때 마치 이동통신사 콜 센터에 처음 연결됐을 때 들리는 그 기계적 친절함이 묻어 있는 듯했다. 누구처럼 작동하는 다른 음성 비서(Voice Assistant) 서비스들의 차분한 목소리에 적응된 때문일 수도 있지만, 누구를 깨울 때마다 음성 비서보다 마치 집안에서 콜 센터에 연결한 기분이 드는 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다.
누구의 이름이나 음색은 그렇다 치자. 누구에서 음성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은 듯 보여도 사실 일상에서 묻고 답하는 건 거의 힘들다. TV 광고에서 보는 것처럼 누구를 통해 음악을 들을 수도, IPTV의 채널을 뱌꿀 수도, 일정이나 날씨를 확인할 수도, 피자나 치킨을 시킬 수도 있다. SKT의 스마트홈과 연동하면 몇몇 사물 인터넷 장치도 원격으로 켜고 끈다. 최근엔 팟 캐스트와 위키피디아 검색도 추가했다. 얼핏 보면 재주가 참 많아 보이지만, 이 중 누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겉으로 보기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게으른 이들을 위해 말로 시킬 수 있을 듯해도 이를 위해서 해야 할 설정, 갖춰야 할 환경은 제법 빡빡하다. 음악 서비스는 멜론만, 피자는 도미노만, 치킨은 BBQ만, IPTV는 BTV만, 사물 인터넷은 SKT의 스마트홈 호환 제품만 누구가 반응한다. 그나마 두 달 동안 기다린 덕에 라디오, 위키피디어 같은 재주가 좀더 추가되기는 했지만, 즐겨 이용하거나 이미 이용 중인 서비스가 아니라면 누구를 이용한 제어는 거의 어렵다.
때문에 누구 같은 지능형 스피커는 아주 대단한 것을 하려는 것보다 평범한 것을 해야만 한다. 이용자의 환경이 충분하지 않아도 활용할 수 있는 재주를 기본으로 내세워야 한다. 그것이 음성 비서로서 기능, 그러니까 대화 기능이다.
만약 누구의 대화 기능이 아마존 에코나 구글 홈과 비교할 수준이었다면 그 가치를 높게 매겼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누구는 그 대화라는 게 사실상 어려운 제품이다. 날씨나 일정, 목적지까지의 시간, 알람 정도는 묻고 답한다. 문제는 이게 누구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전부라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질문을 누구에게 던졌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죄송하지만 다시 말씀해 주세요”거나 “죄송하지만 원하시는 답변을 찾지 못했어요”였다. 예를 들어 오늘 환율에 대해 묻거나 외국의 날씨에 대해 묻거나, 단위 변환을 묻거나 대한민국의 수도에 대해 물어도 모르쇠다.
아마도 ‘누구’를 만든 이들은 그럴 것이다. 그래서 넣은 게 위키피디아라고. 그런데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이 위키피디아에 있는 것도 아닌데다, 그냥 편하게 물어도 답하지 않으니 답답하다. 영어로 질문하는 게 답답할 뿐, 대부분의 질문에 답하는 아마존 에코나 구글 홈과 비교할 때 누구는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조금 알아챌 수 있을 뿐 지금 곁에 두고 음성 비서로 활용하는 데 한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누구는 굳이 음성 비서의 기능을 쓰지 않아도 여러 잔재주가 많다. 누군가에게 무드등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블루투스 스피커로도 쓸 수 있다. 둘을 한꺼번에 쓸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스피커는 그런 기능으로 볼 수 없는 지능형 서비스를 담은 장치다. 글자를 입력해 정보를 찾는 검색창 대신 말로 정보를 찾고 앱을 실행하는 생활 도구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 수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물론 누구는 꾸준히 진화할 것이다. 단지 지금 점수를 매기라면 그냥 매길 점수가 없다고 말하는 게 솔직할 것 같다. 이 장치가 가정에서 쓰게 될 지능형 허브의 미래를 그리는 것이라면 잔재주를 포장하는 것보다 기본적인 대화의 폭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추기를 기대한다. 이 시점까지 누구를 말한다면, 정말 누구를 위한 누구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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