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현직 실제 무당의 곡성 분석

출처 익스트림 무비



출처 팟캐스트 비대위- 현직무당 혜정법사의 영화 '곡성' 전격 해부
http://www.podbbang.com/ch/1168





<황정민 일광이 종구 집에 처음 들어와 휘파람을 부는 장면>
 


휘파람을 부르는 행위는 이른바 소법이다.

 

보이지 않은 영을 부를 때 주파수 대역이라는게 있는데

주파수 대역으로서 휘파람을 부르는데 영들을 부르는 역할을 한다

휘파람을 불면서 쭉 가다가 어떤 신호가 왔을때 그때 일광이 장독대를 가져와 부수는것이다.

 

*장독대 안 까마귀의 두가지 의미


1) 신의 소리를 전하는 역할

2) 죽음의 의미 암시하는 역할


장독대 안의 까마귀가 있다는것은 그 집에 저주가 걸려있었다는걸 의미한다.

저주가 생길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있다는것이다.


이 밖에도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살풀이 굿등 여러가지 주술 상징들이 굉장히 리얼리틱하다.






<실제 무당인 혜정법사의 곡성 감상>


곡성의 맨 첫 화면에 보면 누가복음 24장 성경구절이 나온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 하며 보는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의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성경구절이 영화의 모든걸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즉 사람의 미혹한 마음에 대해 영화는 말한 것 같다

미혹한 마음때문에 없는 귀신도 귀신으로 보는것이고

그 귀신이 좋은 귀신인지 나쁜 귀신인지도 그 사람이 의심을 하면서부터 동전의 앞 뒷면처럼 바뀌는것을 보여준다







<혜정법사가 본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황정민이 연기한 무당 일광이 무명을 만나 토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깊었다


사실상 무명은 본인이 생각할땐 곡성이라는 마을의 '산신'을 대표하는 기운이 들어가있는 사람으로 봤다

보통 대부분 주술을 썼다가 주술이 상대방에게 효과가 없으면 그 주술은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면 속 일광도 그 영향을 받은것이다.






<허주와 살을 날린다는것>


극중 일광은 허주 얘기를 하면서 안좋은걸 쳐 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또 동시에 살을 날릴거란 얘기도 한다


* 살을 날린다는 것의 의미


: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기운적인게 사람들이 느낄수가 있는데 바로 그런 기운을 날린다는 뜻이다

살이라는것은 사실상 '살기' 이다. 즉 죽는 기운이다.

살이 끼면 사실상 좋지 않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충동적인 면에서 이런 살의 기운이 있다

그런데 '원진살' 이란게 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는 살의 기운을 의미한다

사람이 영에 의해서 잠식을 당하면 충동적으로 사람을 패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살풀이는 이것을 누르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원한된 기운을 누르고

원래 살아나야 될 기운을 다시 북돋는것을 말한다.

정확한 의미는 즉, 모든 굿들은 이런 살풀이굿이라 생각을 하면 된다


일광이 살을 날린다는것은 그 외지인에게 살을 날렸다는것보단 사실상 딸 효진에게 날린것이다.

딸에게 기운을 집어넣어서 충동성으로 살인을 저지르는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살인을 저지른 이들의 모습은 대부분 축 쳐져 있고 눈도 멍하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잠식력에 의해서 몸이 움직인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무속에선 이런 모습들을 두고 '귀신에 홀렸다' '빙의되었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렇다면 이런일이 실제로도 가능한것인가?


이건 사실상 사람마다 믿는 믿음체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주술적인 체계와 주술적인 행법이 실제적으로 자신들한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한다면 정말 미칠 수 있다

반면 보이지 않은것에 대해서 '믿지 않는다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사실상 줄어든다.

그런데 인간인 이상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미혹한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본인 정신이 건강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것이다.






<일광이 가장 마지막에 사진을 찍는다. 왜 무당 일광도 사진을 찍는것일까?>

 
영화 상에서 사진을 찍는다는것은 그 사람의 혼을 사진으로 인해 거둬들인다고 생각을 하면 된다

즉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사진을 주술적인 장소에다 놓고 매개체로 삼아서 그 혼을 다스리는데

대부분 이런것들을 가리켜 '식신', '사역시킨다'고 말한다.

그 혼을 자기의 부하나 심부름꾼 이런식으로 사역을 시키는것이다

한마디로 영화 곡성에서 하는 이런 행위들은

사람을 죽이고 그 영을 불러서 사역을 시키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하는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 영들은 보이지 않은 영역에서 작용하는 힘이 상당히 크다.
 
옥황상제가 저승사자를 메신저로서 대신 보내듯이 말이다.

 





<일광이 행하는 것들은 실제 무속에서 행하는 것들>


* 동전점 쌀점

엽전을 던져서 그것으로 점을 치는 방법, 쌀을 던져서 쌀로 나오는 숫자가지고 점을 치는 방법들은
 

현재 흔히 말하는 점집에서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이다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굿을 할 때 돼지 등 날짐승을 제물로 바치는것도

사실상 인간의 혼을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자연에 머물고 있는 '매개체'들을 불러들여서 그 힘을 가지고 뭔가를 성사시키는 것이다







* 장승에 못을 박는 행위


사실 영화보면서 자신(혜정법사 무당)도 일광이 살짝 의심이 들었던게 왜 하필 장승일까 였다.

옛날 옛적 당산이 있으면 마을 입구나 당산 근처에 항상 장승이 있었다

그 장승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장승을 영화에서 무당 일광은 잘라서 쓰러뜨리고 못을 다섯개정도 박는다.

못을 박는다는것은 그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을 죽인다는 의미이다.

즉 일광이 굿에서 장승에 못을 박는다는건 마을 전체에 저주를 내린것이다.






<무명의 정체>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을 할 수 있다


첫째 불교쪽에서는 무명이란 용어가 인간의 분별력과 한계성 오류성으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인간이 분별력이 있으면 세계가 지탱이 된다고 봤는데

그런 분별력이 무너져 내리는 현상을 대신 설명한것이 아닌가란 측면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다


둘째 무명은 사실상 그 마을을 지키는 하나의 무녀로서도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 속 무명이 곡성 마을 산신령의 기운을 받아서

이런 마을에서 벌어지는 행위를 방지하고 고치려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 사이에 혈연관계가 깊다 보니까

종구는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무명의 기운을 무시한 채 가버린다.

이런 인간의 미혹한 마음이 영화속에선 드러난다.

 





<외지인의 정체>


외지인은 일종의 부두술을 하는 부두교쪽으로 봤다.

저주와 악마숭배 등을 하는 부두술 쪽을 하는 사람으로 봤는데

외지인의 제단을 보면 날짐승 머리가 있다.

그런것들은 대부분 일본쪽도 아닌 남미나 아프리카에 있는 흑마법 흑주술 같은 쪽에서 많이 사용한다.

영화에서도 외지인은 의식(ritual) 을 하기 전에

산에 가서 깨끗하게 씻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다음에

의식에서 장구 북을 가지고 치면서 신을 부른다

이 모든게 신을 부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황정민 일광이 굿에서 춤을 추는것도

옆에서 악기들을 연주하는것도 전부 신을 부르는 과정이다.

왜냐면 신은 즐겁고 재밌어야 그 자리에 온다.

그렇게 신을 불러서 제물을 바치고 신께 부탁을 드리는 것이다.








<종구가 일본인을 만나 개를 죽인 이후 다음날 집앞에 염소가 매달려있는 장면의 주술적 의미>


한마디로 '저주' 다.

종구의 집을 풍비박산 내겠다는 의미이다.

짐승의 내장이 다 보인다는것은 안에 있는걸 모조리 다 들춰내겠다는 의미이다.

그 짐승이 집앞에 있다는것은 곧 집 안에 있는 모든걸 다 들추어 내버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집안의 '횡액'(곧 닥쳐올 불행) 을 끌고 오겠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했냐면 이 행위 또한 날짐승을 제물로 바친것이다.

이는 대부분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혼만 있는게 아니라

천지만물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죽으면 혼을 가지고 있다.

힘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는것은 곧 그 위에 있는 상위 포식자를 영, 혼으로서 불러들인다는 의미이다.

그 영들이 들어왔을때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사실상 부른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영으로 불러들일 때 호랑이의 영이 가문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부른 사람에 의도에 따라 가문을 풍비박산 내겠다는 의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주술을 건 사람의 '의미성', '의도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외지인이 주술을 하며 생닭들을 건 장면들도 마찬가지로 저주의 의미인 것이다.

생닭들의 '피'를 바치는 것이다.







<실제 저주 굿은 어떨까>


주술적인 측면에선 자기가 주술을 행하고 나서 상대방이 영향을 못받으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걸었던 주술이 주술자인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주술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주술이 되돌아왔을 때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안다던가 아니면 자신이 행했을 때 정신력이 강하다면 (죄책감등을 느끼지 않는)

이런 저주의 주술적인 행위가 가능하다.

대부분 저주 굿은 그래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기 힘들다.





<만약 종구처럼 일을 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영화처럼 사실상 마을 전체를 전염시킨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도록

모시는 신령에게 주술적인 부탁을 하고 살풀이 굿을 할 수 있겠으나

사실상 모든 사람의 정신이 오염되면 치유하기가 힘들다.

이런 경우 큰 제례를 해야한다.

굿이 곧 제례이다.

전통적으로 옛날에는 마을 단위로 한 마을 당 무당이 한명씩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무당은 제례를 하는 제사장 급이었다. 이런 제례를 마을 단위, 나라 단위로 크게 했다.

그게 시간이 흐를 수록 축소되고 없어지면서 개인의 치성쪽으로 변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만약 종구가 가족들과 같이 곡성 마을을 떠난다면 해결이 될 수 있지 않겠냐라는 말이 나오는데

떠난다 할지라도 사실상 영이 남아있는 한 그 영은 종구와 가족들이 어딜가든 따라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식으로든 그 영과 살을 풀어야 해결이 될 수 있다.


즉 혼미한 정신을 주술로 통해 잡아야 하는데 사실상 영화에선 잡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에서 내 딸이 왜 그렇게 되었냐란 종구의 말에 무명은 '네 딸 아비가 (종구) 의심을 해서 그리된것이다' 말한다.

즉 이미 종구는 마음속에서 의심을 했기 때문에 만약 다른 마을로 이주한다 하더라도

그 마을에서 또다른 의심을 했을것이다. 그러면 그 의심은 또다른 마을에 또 퍼지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또 영화에서 한약방 주인과 함께 산을 오르다 주인이 벼락을 맞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벼락을 맞는 자리가 '당산 (토지나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고 하여 신성시하는 마을 근처의 산이나 언덕) ' 자리다.

경외의 대상인 신을 노하게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벌을 받은 것이다.

영화에서 쾌청했던 날씨가 갑자기 비가 오고 천둥이 쳤던것도 신의 노여움을 드러낸 장면들이다.


영화속에서 등장한 노루가 실제론 날짐승이 먹고 갔을 수도 있는것이고

아니면 노루가 자연사한것일 수도 있는데 한약방 주인은 그 노루에 의미를 부여한다

눈 빨간 악마가 노루를 먹는것을 봤다는 의미 말이다.

이런 의미(의심)들이 사람의 정신을 타고 오염이 되기 시작하면서 마을로 확산이 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런 의미들이 마을전체의 '횡액'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당의 설계력과 도력>


무당에겐 설계도 필요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행할 때 어떤 의미성으로 전달 될 수 있는 행법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굿을 하는것이다.

 




<무당 혜정법사의 영화 곡성에 대한 최종 정리>


영화의 의미성으로 따지면

사람이 혼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정신이 흔들리고 정신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몸이 가만있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옛말에 '귀신과 빙의는 사람의 정신을 타고 들어와서 사람의 몸을 장악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서서히 몸을 장악하다가 최종적으로 그 사람 정신을 전부 장악한다는 것이다.

묻지마 살인이나 이런 사건들이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영화 곡성의 주제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믿어도 상관은 물론 없지만 과도한 의미 부여는 하지말자' 는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현상이 벌어질때 대부분 원인을 찾으려 하고 의심을 한다.

나아가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이런게 주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의 정신을 많이 망가뜨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속에서 '현혹되지 마라' 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그냥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일 뿐이다.

여기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긍정적인 의미는 각자에게 도움이 되지만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의심은 의심을 타고 또다른 의심을 낳을 뿐이다.

의심은 불안을 타고 불안은 두려움을 만들며 두려움은 공포를 만든다.

공포는 결과론적으로 그 사람을 장악한다.

현혹됨을 본인이 '알면' 괜찮다.

현혹되는 것조차 본인이 모를 경우 혹은 자신은 현혹된 게 아니다라 부정할 경우 그것 또한 본인을 잡아먹을 수 있다.

현혹되었다는것을 본인이 알면 그 기운을 바꿀 수 가 있는데

그 기운이 있다는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곧 내 안에 있는 정신, 기운을 부정하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파사현정'이라 한다.


(파사현정이란: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뜻이다.
사악한 것을 깨닫는 것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므로

얽매이는 마음을 타파하면 바르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쁜 기운을 쳐내면 바른기운은 자동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것을 알면 올바른것은 알아서 나온다.

즉 일어난 현상에 대해선 그대로 바라보는 힘을 키우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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