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석에서 노트를 잘 정리하는 법
프롤로그
난 바둑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예전엔 세계대회 결승전에 나선 조훈현과 섭위평의 대국을 생중계로 지켜보았고 이후로도 이창호, 이세돌의 대국을 보곤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된건 그 대국을 지켜보는 자들이 가만히 지켜보지 않고 참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라는 것이었다.
TV로 대국을 중계하는 국수는 계속해서 수의 움직임과 변화를 바둑판에 두어가며 설명을 했고 대국장 바깥쪽 검토실에서는 대회에 참가한 기사들과 바둑계 인사들이 격론을 벌여가며 승부를 예측하는 모습이 생소해 보였다. 심지어 승부를 낸 두 기사가 끝나고 복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이들에겐 그러한 문화가 당연해 보였다. 중국으로 건너 가 바둑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창호를 넘어서기 위해 거의 모든 기사들이 이창호의 모든 기보를 뒤지면서 연구한다고 한다. 아니 모든 기사들에게 기보를 연구하는 일은 생활화 되어 있다. 아마 그들은 반상위의 실전에서 자신들이 펼쳐낼 창의적인 전략을 위해 수 많은 기보들을 분석하고 그 신묘함에 감탄하고 허점을 나름 보완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드려 할 것이다.
파워포인트 블루스를 출간하고 강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난 대부분의 기획자들이 논리와 스토리 전개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강의를 통해 전달하였지만 그것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이론 교육에 이어 실제 실습을 통해 주제를 던져주고 논리를 구성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예상하는 결과물에 크게 미치지 못했고 난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원칙을 어떻게 실제 적용하는지 계속 우왕좌왕했다. 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워포인트블루스 후속편의 출간을 미루고 그때까지 써놓은 모든 원고들을 다 날려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결심했다.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온 것은 논리와 스토리 설계에 대한 실제적인 수련방법이었다.
수영을 배울 때 우리는 네 가지 영법에 대한 자세와 동작을 배우기 이전에 ‘음-파’와 같은 숨쉬기 연습, 물에 떠서 균형을 잡는 연습, 킥판으로 발차는 동작에 대한 연습을 먼저 한다. 이러한 것들을 드릴(drill)이라 하는데 직접적인 자유영 동작이 아니지만 이 드릴을 통해 정작 해당영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습득하게 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논리설계의 드릴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오늘 소개할 것이 나의 오랜 고민끝에 나온 첫 번째 드릴로 난 이것을 Idea Dictation (가칭)라 부르기로 했다. 모든 바둑 기사들이 기보를 연구하는 것 처럼 모든 기획자에게 유용한 것이 기보를 연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맙게도 인터넷엔 좋은 기보들이 넘쳐난다. TED 강연, 세바시 강연 등이 대표적인 기보들이다. 지금부터는 그러한 강연들을 그냥 간단하게 보아넘기지 말고 일정한 절차에 따라 분석해 보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 강연을 연구하는 것은 바둑기사가 기보를 연구하는 것 이상으로 이점이 많다.
Idea Dictation의 두 가지 이점
Idea Dictation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보고) 핵심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남의 강연을 들으며 논리를 구조화 시켜보고, 전개과정을 도식화 해보는 경험이 쌓이면 논리/이야기 전개 패턴이 머리에 축적되고 그를 나의 이야기에 응용할 수 있는 추력이 생긴다. 당연히 나중에 나만의 논리를 설계할 때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이 첫번째 이점이다. 이러한 연습없이 처음부터 자신의 논리를 백지상태에서 설계해 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우리는 사실 나의 얘기를 남에게 할 때보다 들어야 할 경우가 더 많다. 조직내 경험이 적은 주니어 기획자나 직급이 높은 시니어기획자, 임원들 모두 마찬가지다. 주니어 기획자들은 입사초기 자신들만의 논리를 펼쳐낼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주로 듣는다. 미팅이나 회의때 구석에서 회의록을 정리하는 것도 대개 이들의 몫이다. 회의록이란 것은 듣고 정리한 결과물이 아닌가. 시니어들은 사실 더 많이 듣는다.
회의에 참석하면 누군가의 발표내용을 듣고 즉석에서 토론을 하거나 논쟁을 벌여야 하며, 후배들이 가져온 보고서를 검토해야 하고, 세미나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면 참관보고서를 써야 한다. 고직급자들은 대개 회의의 노예다. 남의 발표를 듣고 즉석에서 핵심을 파악하여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발표자가 논리정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라면 그것이 쉽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그들은 엉망으로 발표되는 그 내용만으로 논리적인 허점을 간파하고 그것을 그 자리에서 지적해 내야 한다. 그러니 남의 이야기를 듣고 핵심을 간파하는 Idea Dictation이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 드릴을 연습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오히려 첫번째 보다 더 광범위하게 자주 쓰인다 할 수 있다.
좋은 정리의 요건
내가 듣지 않았던 TED강연을 누군가 요약정리해 놓은 노트가 있다. 내가 그 노트를 봐야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짧은 시간에 강연자의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만약 ➀ 짧은 시간내에 읽을 수 없다고 판단되거나 ➁ 읽고 난 뒤에도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파악되지 않는다면 난 차라리 15분짜리 TED 영상을 직접 보기로 결정할 것이다. – 물론 훌륭한 요약노트를 보고나서 나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 여기서 자연스럽게 좋은 정리의 요건 두 가지가 나왔다.
➀ 직관성 :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을 것
➁ 논리 : 핵심 파악이 가능할 것
좋은 정리의 요건은 ‘핵심을 빠르게 간파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방식대로 TED강연이나 회의록을 정리해보고 그것을 스스로 읽어보고 남들과 바꿔서 읽으면서 ‘짧은 시간’과 ‘핵심’ 두 가지의 요소 중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평가해 보라. 그리고 눈을 돌려 다양한 방법으로 TED나 세바시를 정리해 놓은 노트들을 찾아서 그들을 두 가지의 잣대로 평가해 보라.
직관성 : 비주얼씽킹의 핵심
정리는 직관성이 중요하다 내용을 떠나 전체 모습에서 우리는 짧은 시간내에 그것들을 읽어 낼 수 있을 지 알 수 있다. 예를들어 어떤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A와 같은 노트를 보면 일단 한숨부터 나온다. 아마 강연의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한 노트일 것 같다. 위의 두 가지 요건을 평가해 보자면 짧은 시간내에 간파하기도 어렵고 핵심이 도드라져 있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A타입의 노트엔 아직 희망이 있다. 적어도 정보수집만큼은 꼼꼼하게 되어 있을 듯 하고 이를 바탕으로 두 번째 ‘핵심정리’노트를 만든다면 저 두 가지 요건을 모두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B와 같이 마인드 맵(mindmap)으로 정리된 노트들도 볼 수 있다. 여기엔 A에 없는 ‘구조’가 보인다. 적어도 직관적으로는 더 낫다는 의미이다. 이야기 전체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우리는 일단 네 부분의 타이틀만 보아도 큰 흐름을 잡을 수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고 A나 C타입같이 초벌정리를 끝내놓고 다시 B로 정리해도 된다.
이 형태의 특징은 마인드맵을 아웃라이너(outliner)처럼 정리해 놓은 것으로 맨 왼쪽의 큰 박스 하나를 최상위레벨(Level 1)의 노드로 놓고 그 아래에 4개의 하위레벨(Level 2) 또 각각의 아래에 몇 개씩의 펼쳐지는(> Level 3) 형태다. 아웃라이너 방식의 정리엔 함정이 있다. 크게 두 가지의 아웃라이너 정리방법이 있는데 첫번째는 메시지 중심의 정리고 두번째는 목차중심의 정리방법이다.
메시지 중심이라면 맨 왼쪽 Level 1은 전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결론 메시지’가 되며 Level 2는 그 한 문장을 4문장으로 풀어쓴 것이 되고, 그 다음 레벨은 4문장 각각을 더 풀어쓴 것이 된다. 이런 정리의 장점은 한 문장으로도 전체를 설명할 수 있고 네 문장으로도 말할 수 있으며 더 깊이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맨 왼쪽으로 갈 수록 중요도가 커지고 오른쪽으로 갈 수록 왼쪽 내용의 부연설명, 이유, 증거가 (Why에 해당) 나오게 되므로 핵심을 빠르게 간파할 수 있다. 나는 스토리 보드를 이 방식으로 만든다.
그러나 목차 중심일 경우엔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맨 왼쪽은 전체의 제목이, 그 다음 4개는 목차가, 그 아래에는 세부 타이틀이 나오는 식인데 이건 책의 목차를 보는 것과 비슷하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방식에서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가장 하단의 레벨에 위치하게 될 경우가 많아 핵심을 파악하려면 모두 읽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전체 Tree구조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을 수록 내용을 빠르게 간파하는 것은 어렵다.
C타입은 사실 내 노트의 모습이다. 강연을 듣거나 회의에 참석하여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을 모양새있게 받아적는 것을 나는 포기했다. 그 대신 강연이나 회의에서는 내 눈과 귀로 입력된 것을 머리와 손으로 수집한다. 여기엔 수집의 의미만 있을 뿐이어서 난 자리로 돌아가 어지럽게 수집된 정보들을 재 구성하여 단순하게 내 놓는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기획자들이 아마도 이런 형태로 정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키워드 위주지만 나중에 등장하는 키워드와 화살표로 연결되기도 하고 중요도 표시를 위해 동그라미나 별을 다른 색으로 즉석에서 그려넣으며 말이다. C타입의 노트는 나만을 위한 노트이며 남들에게 내보이긴 민망한 형태다.
D타입의 노트는 텍스트를 그림으로 대체한 비주얼씽킹의 산물이다. 아마 처음부터 저런식으로 그려낼 수는 없을 것 같고 A나 C타입을 거쳐 이르게 되는 최종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 A,B,C,D 노트를 늘어놓고 마음에 드는 혹은 잘된 노트를 뽑아보라 한다면 D타입이 가장 선호도가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림으로 보이는 D노트는 대단히 산만하다. 맥락의 흐름도 없고 핵심이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아기자기한 재미는 있을 지언정 말이다. D는 보이기 따라서는 최악일 수도 있다.
핵심을 빨리 간파하려면 슬라이드나 노트가 눈 앞에 등장한 순간 3초도 안되어 어떻게 내용을 파악해갈지 결정할 수 있는 모양새라야 한다. 현재 상태라면 B타입의 노트가 단 1-2초만에 전체 모양새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우리를 힘겹게 만든다. 심지어 비주얼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D조차 말이다.
짧은 시간에 핵심을 파악하도록 돕는것은 ‘비주얼’의 영역인데 그 핵심은 그림보다 구조에 있다. 예를들어 D는 그림이 있을 뿐 구조가 없는 상태이다. 구조나 구도는 꼭 그림으로 그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들어 E와 같이 텍스트만으로도 직관성을 줄 수 있다. 폰트의 크기, 단락의 구분, 색상 등으로 말이다. 멀리서 보아도 E와 같은 모양새는 맨 처음 가장 중요한 (결론)키워드가 나오고, 그 아래에 결론을 뒷 받침하는 세 단락의 이유와 증거들이 나타나는 모양새다. 우리는 이 구도를 확인하고 읽기 시작할 것이기에 전체를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D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의 덩어리(그룹)으로 크게 묶는다면 직관성이 더 높아진다. 게다가 흐름도 생겼다. 누구라도 왼쪽부터 읽기 시작할 것이며 크게 세 마디의 맥락을 가졌는데 첫 번째 마디에서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두번째 마디의 하나로 연결되며 그것이 다시 두 갈래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식이다.
비주얼씽킹(Visual Thinking)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각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그러니 Visual 보다 Thinking이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Visual은 구도(구조)와 내용(그림)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하는데 구도없는 그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는 그리기 욕구가 기본적으로 내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없는 중에도 슬라이드 내에 쓰이는 그림에 빠져 자신의 임무도 잊고 컬러와 클립아트를 반나절 동안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난 강의를 시작하고 지난 4년간 그들에게 제발 예술에 가까운 슬라이드 만드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논리와 증거를 보강하는데 쓰라고 말해왔다. 마찬가지로 비주얼씽킹 역시 ‘예술혼 담은 슬라이드 만들기’와 비슷해져 가고 있다. 손으로 잘 그릴 필요도 없고 거기에 반나절 가까이 시간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순수예술의 세계로 넘어간 느낌이다.(진짜 그것이 좋다면 어쩔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구도나 논리 같은 부분은 너무 부족한 것이 요즘 주위의 비주얼씽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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