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전문가가 말하는 ‘핀테크 육성 비결’ 4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있겠지만, 저는 한국에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넘치는 에너지와 충분한 기회가 보여요. 은행과 정부도 일단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고 봅니다. 이들이 시늉만 하는 건지 아닌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겠죠. 진짜로 핀테크를 키우고 싶다면 영국 무역투자청(UKTI)은 얼마든지 도움을 드릴 준비가 돼 있습니다.”
UKTI에서 핀테크 전문가로 일하는 사울 다비드는 한국에서도 핀테크 산업이 꽃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한영 금융포럼 참석차 처음 한국을 찾은 사울 다비드를 5월27일 오후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나 영국에서 핀테크 산업이 꽃핀 비결을 물었다.
1. 규제기관에 ‘경쟁 활성화’ 맡겨라
사울 다비드는 한국 못지 않게 강력한 금융규제국이었던 영국이 5년 사이에 ‘핀테크 수도’로 거듭난 비결이 금융감독청(FCA) 설립이라고 설명했다. 금융감독청은 한국 금융위원회 같이 금융회사를 규제하는 정부 기구다. 2013년 4월1일 설립됐다. 겨우 2년 남짓한 신생 조직이지만 핀테크 생태계에 기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고 사울 다비드는 말했다.
“FCA의 목표는 크게 2가지입니다. 금융소비자 보호와 금융시장 내 경쟁 촉진이죠. 이게 핵심입니다. FCA에게 금융시장을 더 경쟁적으로 만들라는 역할을 부여한 덕에 시장이 더 개방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쟁을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턱을 낮춰 누구나 시장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새로 나타난 회사가 더 좋은 서비스를 내놓는다면 거대 은행도 대응해야만 합니다. FCA는 경쟁이 정체된 금융시장을 열어젖혔습니다.”
FCA의 탄생은 금융위기에서 얻은 교훈 덕분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전 영국에는 FSA라는 규제기관만 있었다. 한국 규제당국과 마찬가지로 금융시장을 관리∙감독하는 게 FSA가 하는 일이었다. 금융시장을 안전하게 관리하려고 규제 장벽을 너무 높게 세우자 부작용이 나타났다. 규제 장벽 때문에 외부에서 금융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워지자 자연스레 경쟁이 정체됐다. 울타리 안에 들어간 금융회사는 서로 경쟁하기보다 현상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경쟁 없는 시장은 고인 물처럼 썩어들어갔다. 그래서 어느 금융회사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다가오는 사실을 눈치채고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영국 정부는 금융서비스법을 만들고 규제기관을 둘로 쪼갰다. 소비자 보호와 경쟁 촉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FCA가 한 곳이다. 다른 한 곳은 영국 중앙은행(BOE) 소속으로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를 견제하는 건전성감독청(PRA)이다. 행동 주체를 쪼개 각자 역할을 충실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한 셈이다. 사울 다비드는 금융시장의 큰 밑그림을 그리는 규제기관에 ‘시장 경쟁 활성화’라는 역할을 부여하자 자연스레 핀테크 스타트업이 금융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설명했다.
2. 기반 생태계 먼저 만들어라
영국 정부의 핀테크 육성 전략은 5년 전부터 시작됐다. 2010년 당시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는 저렴한 임대로 덕분에 IT기업이 알음알음 모여들던 런던 동부 지역을 ‘테크시티’라고 이름 붙이고 이 지역을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IT 중심지로 집중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영국은 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 했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투자자와 IT 스타트업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자 강력한 상승 효과가 일어났다. 2010년 85개에 불과했던 스타트업이 수천개로 늘어났다. 투자 규모도 치솟았다. 2014년 런던 소재 IT기업이 유치한 투자금액은 14억파운드(2조3735억원)였다. 5년 사이에 20배가 늘어났고, 2013년과 비교해도 2배로 뛴 규모다.
핀테크는 금융과 IT가 결합하는 분야다. IT 생태계가 조성되자 자연스레 핀테크 시장이 싹틀 조건도 마련됐다고 사울 다비드는 설명했다.
“테크시티를 세울 때만 해도 전체 ICT 기술을 다 육성했죠. 3년 지난 2013년 핀테크가 나타나면서 영국이 주도할 만한 기회가 눈에 띈 겁니다. 그래서 테크시티 개발은 이어가면서 핀테크 등 몇 가지 분야를 덧붙인 거죠.”
3. 주인공 자리는 민간에 맡겨라
듣고보니 의아했다. 한국은 아직 IT 창업 생태계도 자리잡지 못한 형편이다. 그런데 정부는 핀테크 육성을 국가적 과제로 꼽고 육성하려고 열심이다. 이런 상황에 한국에 핀테크 생태계가 나올 수 있을까 우려됐다. 사울 다비드는 금융시장 개혁을 민간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에서 밑작업을 벌이기는 하지만 주도적인 역할은 민간 전문가가 도맡아야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정부기관 소속이지만 그는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딱 잘라 얘기했다.
“영국 핀테크 시장 육성은 모두 민간 부문에서 이뤄집니다. 반드시 민간 부문이 해야 합니다. 정부는 스타트업을 고르는 재주가 없습니다.”
사울 다비드는 금융업계와 규제기관, 투자자, 스타트업 사이에서 핀테크 시장을 육성해야 모두가 발전할 수 있다는 목적의식을 공유하고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할 민간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에릭 반 데르 클레이 앤틱 최고경영자(CEO)를 예로 들었다. 테크시티 육성 당시 민간 전문가로서 테크시티 CEO직을 맡아 런던 안에 IT 중심지를 성공적으로 꾸린 뒤 앤틱이라는 핀테크 육성 회사를 차려 영국 핀테크 시장에 산파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한국에 필요한 건 에릭 같은 사람일지 모르겠네요. 핀테크 산업을 대표할 수 있는 민간 부문의 인재 말이죠. 투자가와 스타트업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같은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에릭은 이런 일을 정말 잘 합니다. 테크시티를 만들 때부터 비전을 잘 설파했죠. 이제는 영국 핀테크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영국이든 뉴욕이든 에릭이 가서 얘기하면 사람이 모여듭니다. 그가 그동안 쌓은 업적 덕분이죠. 에릭은 공무원이 아닙니다. 정부는 비즈니스를 잘 못해요. 성공하려면 민간이 주도해야 합니다.”
4. 육성기관은 금융 중심지에 둬라
“핀테크 육성 기관이라면 모두가 만날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서울에서 1시간씩 걸린다면 말이 안 되죠.”
핀테크지원센터가 판교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사울 다비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런던의 신흥 금융중심지인 카나리와프에 자리 잡은 레벨39를 예로 들며 핀테크 지원 기관은 핀테크 시장 관계자가 모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이 어디 있나요? 핀테크 지원 기관은 바로 거기 있어야 합니다. 스타트업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모든 은행이 판교에 있다면 판교에 가고 싶어하겠죠. 거기 가야 제품을 팔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1시간30분씩 걸려서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야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레벨39가 카나리와프에 터잡은 이유가 이거죠. 바로 옆 건물에 만날 사람이 있다면 빨리 미팅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일 할 수 있죠.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이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덕에 레벨39가 성공한 겁니다. 정부가 시킨다고 사람들이 움직이지는 않죠.”
정부 주도 국내 핀테크 육성 정책, 시발점으로는 나쁘지 않아
아직 국내 핀테크 시장은 걸음마 단계다. 그나마도 자생적인 생태계가 아니라 정부와 거대 은행이 주도하는 상황이다. 핀테크 스타트업은 정부의 핀테크 육성 정책이 거대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국내 핀테크 시장의 현주소를 어떻게 보냐는 질문에 사울 다비드는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정부가 먼저 키를 돌리는 단계겠죠. 금융 서비스는 규제가 심한 분야이기 때문에 정부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는 시작점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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